약화사고 발생에 대한 인과관계에 대한 책임논쟁이 의약품으로 인해 발생했을 개연성이 높은 경우 이를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의약품 투여로 약화사고를 당하고도 거증책임의 사각지대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던 불특정소비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 되고 있다.
 

혈우병치료제를 투약 후 에이즈(AIDSㆍ후천성면역결핍증)를 유발하는 HIV바이러스에 집단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에게 해당 의약품제조업체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다른 환자들의 추가 소송도 예상된다.
 

지난 9월 29일 대법원 3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혈우병 환자 이모(22)씨 등 16명과 이들의 가족 53명이 제약사 녹십자홀딩스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제약회사가 제조ㆍ유통한 ‘훽나인’이라는 혈액제제를 투여받기 전에는 HIV 감염을 의심할 만한 증상이 없었고, 투여 후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됐으며, 치료에 사용된 혈액제제는 HIV에 오염됐거나 오염됐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훽나인’이라는 B형 혈우병 치료제를 제조ㆍ유통됐던 1990년대 초반 무렵부터 B형 혈우병 환자에서 HIV 감염자가 집단 발생한 사실과 훽나인의 원료인 혈액을 제공한 수만 명 중에서 한 명이라도 감염된 경우 그 혈액을 원료로 사용한 풀(pool)에서 만들어진 모든 혈액제제가 오염될 가능성이 높은 점과 HIV에 감염된 혈액도 항체 미형성기에는 음성반응이 나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혈액제제의 결함이나 제조업체의 과실로 인해 원고들이 HIV에 감염됐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은 만큼,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추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이어 "에이즈에 감염된 일부 원고들이 외국산 혈액제제나 수혈을 받았다거나 HIV 유전자 정보가 감염 혈액 제공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HIV 유전자 정보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정만으로 이러한 추정이 번복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손해배상 청구 시효가 지났다는 녹십자홀딩스 측 주장에는 “시효 계산의 기준이 되는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가해행위가 발생한 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손해가 발생한 날’을 뜻한다”며 단순히 HIV 감염 시점을 손해배상 시효의 기산일로 볼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이어 “에이즈는 잠복기가 10년으로 길어 에이즈 환자가 됐다는 손해는 HIV 감염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라며 “파기환송심인 고등법원이 이를 살펴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여부를 심리하라”고 주문했다.

혈우병을 앓아오던 이씨 등은 녹십자홀딩스가 설립한 한국혈우재단에 회원으로 등록한 뒤 재단을 통해 이 회사가 제조한 혈우병 치료제를 유·무상으로 공급받았다. 이후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되자 2003년 녹십자에 총 32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에서는 혈액제제 투여와 에이즈 감염 사이의 연관성을 최초로 인정해 이씨에게 3000만원을, 가족에게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나머지 원고들은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안지 10년이 넘어 시효소멸의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면 2심은 "혈액제제 투여와 에이즈 감염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며 1심 판결을 뒤집어 이씨를 포함한 모든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한편혈우병을 앓던 이씨 등은 녹십자홀딩스가 설립한 한국혈우재단에 회원 등록을 한 뒤, 재단을 통해서 혈우병 치료제를 유ㆍ무상 공급받았고, 1990년대 초반 HIV 감염 사실을 알게 되자 2003년 이 회사를 상대로 32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은 이씨에게 3,000만원을, 가족한테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면서도 다른 원고들의 청구는 시효 소멸 등의 이유를 들어 기각했다. 반면 2심은 “혈액제제 투여와 HIV 감염 사이에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다”며 이씨를 포함해 모든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